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언제나 관심을 끈다. 특히나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진 유명한 사건, 혹은 나와 접점이 있는 역사적 배경이라면 더욱 그 영화를 보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2017년 2월에 개봉한 '23 아이덴티티'는 아주 끔찍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3명의 여학생이 결벽증 환자 '데니스'에게 납치되면서 시작된다. '데니스'는 본래의 인격인 '케빈'과 함께 23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고, 마지막 자아이자 24번째 인격인 '비스트'(인간의 가장 진화된 형태라고 한다.)가 등장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23 아이덴티티'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19년 만에 완성한 세계관(언브레이커블-23 아이덴티티-글래스)의 두 번째 영화이다.)
이 영화는 '빌리 밀리건'이라는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빌리는 1977년 수 차례의 강간 및 무장 강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빌리는 1977년 사건이 일어나기 7년 전 고등학생 때가 자신의 마지막 기억이라고 주장했다. 16살이었던 그는 학교 여자 화장실에서 아이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했고, 계속되는 따돌림에 결국 유서를 남기고 옥상에서 뛰어내린 그 순간이 마지막 기억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법원으로부터 다중인격을 인정받은 빌리는 무죄를 선고받았고, 10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치료감호를 받는다. 그동안 그가 보여준 인격은 모두 24개였다. 24개 인격체 중 범죄를 저지른 인격은 에이들리나(Adalana), 19세 여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24번째 인격, '선생(Teacher)'은 23개의 자아를 하나로 융합시킨 인격이었다. 그렇게 10년 동안 정신병원 생활을 지낸 밀리건은 더 이상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겪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아 1988년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중인격 살인사건이 있었다. 1998년 3월 2일 새벽 1시에 벌어진 살인 사건이다. 피의자 '장 씨'는 살인을 벌이며 자신이 '섀도'라고 말했다. 그는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였고, '섀도'를 자신이 가진 또 다른 인격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그 당시 전문가들은 악령에 빙의했다, 연기를 했다, 정신 이상이다.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결국, 법원은 범인의 행동을 연기라고 판단했고, 확실한 범행 동기까지 있다고 보았다. '빌리'와 '장 씨'의 이야기는 다중인격 사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정말로 다중인격이 존재하며, 이를 인정해주어야 할까?
거짓 이야기를 꾸며낸 환자들은 자신에게 다중인격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어렵지 않게 다중인격장애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치료사를 찾아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거나 어딘가 분리되는 느낌이라고 호소하면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다른 인격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징후라는 말을 들었다.
-로렌 슬레이터 <블루 드림스>
하지만 다중인격 유행은 곧 잠잠해졌다. 그 이유에는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가 있었다.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미국의 인지 심리학자이자 인간 기억 전문가이다. 그녀는 인간 기억의 연약성에 관한 연구(the malleability of human memory)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동 성 학대에 대한 기억을 회복한 것(recovered memories of childhood sexual abuse)을 포함해 오보 효과(the misinformation effect)와 목격자의 기억(eyewitness memory), 그리고 거짓 기억의 창조와 본성(the creation and nature of false memories)에 관한 연구로 명성을 얻었다.
'거짓 기억(False memory)'은 심리학에서 사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회상하거나 실제로 일어난 방식과 다르게 회상하는 현상이다. 피암시성(suggestibility), 관련 정보의 활성화(activation of associated information), 잘못된 정보의 통합 및 출처 오인(the incorporation of misinformation and source misattribution) 등은 다양한 유형의 거짓 기억 현상에서 기초가 되는 몇 가지 메커니즘으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거짓 기억을 형성하기 위한 다양한 자연적 요인 중 하나가 트라우마이다.
"트라우마"는 문화가 변하고 페미니즘이 대두되면서 누구나 아는 말이 됐고 그러자마자 악마 복장을 한 사람의 흉악한 행위에 대한 억압된 "기억"이 쏟아졌다. 그렇게 나온 기억들은 점점 선을 넘었다.
-로렌 슬레이터 <블루 드림스>
로프터스는 트라우마의 역사를 '거짓 기억'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하였고, 이러한 주장을 통해 외상 이력이 있거나, 외상 증상이 있는 사람들은 출처 감시(소스-모니터링) 장애를 포함하여 기억력 결핍에 특히 취약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또한, 그녀는 '애착 스타일'과 '어린 시절에 대한 거짓 기억의 보고' 사이에 있을 법한 연관성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연구를 통해 성인의 애착 스타일은 유아기 사건의 기억과 관련이 있으며, 그러한 기억의 인코딩(부호화) 또는 검색(되새김)이 애착 시스템을 활성화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애착 회피형 성인은 어린 시절 부정적인 정서적 경험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운 반면에, 양가적 태도(반대 감정이 병존하는)를 지닌 성인은 이러한 경험에 쉽게 접근했다. 또한 애착 회피성 성인은 애착 시스템의 활성화에 대한 생리적, 정서적 반응을 억제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 데이터는 성인 자신 또는 그들의 부모님의 애착 스타일이 어린 시절 거짓 기억과 관련성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연구 데이터는 보다 강력한 애착 회피가 유년기의 잘못된 기억을 형성하는 성향 간에 끈끈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시사했다.
로프터스의 연구는 모든 것이 지나쳤던 1980년대를 할퀴고 지나간 트라우마 파티의 종말을 알렸다. 이제 다중인격장애는 진단명도 아니다. 그 대신 해리성 정체감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가 생겼다. 다중인격장애와 몇 가지 특징이 비슷하지만, 다행히 이 진단명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트라우마의 역사는 정신과 진단명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외부 영향을 받기 쉬운지 보여준다.
-로렌 슬레이터 <블루 드림스>
끔찍한 일을 벌인 미국의 '빌리 밀리건'과 한국의 '장 씨'는 모두 어린 시절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유년기 트라우마를 겪었고, 트라우마를 요소로 거짓 기억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애착 회피형 성인으로 자랐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 시절 부정적인 정서적 경험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웠고, 그 기억에서 계속해서 달아나려 했다. 그리고 그들은 생리적, 정서적 반응을 억제하려 했다. 계속해서 도망가던 그들은 기억의 인코딩과 검색을 통한 애착 시스템을 계속해서 활성화하지 못하였다. 즉, 로프터스의 연구에 따라 그들은 계속해서 강력해지는 애착 회피로 인하여 어린 시절 잘못된 기억을 형성해버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빌리와 장 씨가 다중인격 모습을 보인 것은 그 시대의 유행처럼 빠져들어 '진단 표류' 현상을 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진단 표류란 처음 잡아놓은 개념에서 이탈한 진단명을 가리킨다. 한때 특정 행동하고만 연관을 짓던 질병이 갑자기 모든 사람과 관련성을 보이며 문제의 장애는 물에 완전히 희석한 것처럼 기존의 의학적 의미를 모두 잃는다.
-로렌 슬레이터 <블루 드림스>
나 또한 '진단 표류'라는 현상을 겪은 적이 있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 말하며, 곧장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가도록 한창 강조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10개월간 배를 타고, 한국에 돌아온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유행에 발맞추어 '나는 우울하다'라고 생각했고, '진단 표류'에 빠져 곧장 집 근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찾아갔다. 몇 번의 상담 후에 약을 처방받았고, (다행히도) 2주 정도 복용했었다. 나는 그 약이 무슨 약인지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그냥 주니깐 받아먹었다. 약을 갈구하듯 그냥 넙죽 받아먹었다.
그래서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인 정신의학은 '약물 쾌락주의pharmacological hedonisom'라는 대중문화를 키웠고 그 결과 정신 질환에 걸리지도 않은 수백만 명이 단지 자의식의 무거운 짐을 덜기 위해 새로운 약을 갈구하게 됐다.
-로렌 슬레이터 <블루 드림스>
'빌리'와 '장 씨'가 정말로 '거짓 기억'으로 조작된 삶을 살았을까? 로프터스의 연구(거짓 기억)를 반박하며 따지고 들 수도 있겠지만, 빌리와 장 씨가 저지른 끔찍한 사건은 '사실'임이 틀림없다. 나 또한 내 건강을 그저 유행에 맡겨버린 것은 '사실'이다. 만약 2주 동안 먹던 그 약에 중독되었다면, 나는 지금 진짜 우울증에 걸렸을 것이다. 사실만 보면 트라우마 혹은 거짓 기억에 중독되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언제나 또렷이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중독은 정상적이지 않다.
-데이비드 T. 코트라이트 <중독의 시대>
프로작은 나를 한 사람으로서 기능하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중독자로 만들었다. 의사들은 정신과 약이 "길거리 마약 street drug"과 다르다고 정색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를 버티게 하는 합법적인 약과 도시 어딘가의 막다른 골목에서 살 수 있는 불법 약에 큰 차이는 없다.
-로렌 슬레이터 <블루 드림스>
블루 드림스 | 로렌 슬레이터 - 교보문고
블루 드림스 |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저자 로렌 슬레이터 신간! 35년간 정신과 약을 먹어온 한 심리학자의 고백! “약은 발견이 아니라 재발견될 것이다” 환자이며 심리학자인 그녀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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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 -로렌 슬레이터 <블루 드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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